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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0일 ~ 3월27일
부산지방병무청 갤러리

전시기간:2007 9.8- 11.24(토)

매주 토요일만 오픈함

전시시간: 12:00 - 6:00까지.

장소: 킴스아트필드 갤러리

주소: 부산 금정구 금성동 285 1/3

전화: 517 - 6800

부산대학교 위 금정산  산성 마을 안에 위치

산성버스 203번 버스 종점

오시는 방법: 온천장 지하철 맞은편 육교 아래 203번 산성행 버스 -  203번 버스 종점에서 내림 - 위로 3분정도 걸음

※전시장 가셔서 수족관새 소개로 왔다고 하시면 작가분의 친절한 설명도 들으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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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술사의 탄생
―<동상이몽-보색>전, 변대용 개인전 서평

김만석(미술평론가)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
―김수영, 「푸른 하늘을」 중에서

변대용이 구축해 놓은 세계에 들어서면 평온함이 목을 죄는 듯하다. 아니, 변대용의 세계는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 매끄럽게 마름질된 조형들은 자체로 무서운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아름답다는 반응으로 이끌림에도 그 세계가 들이미는 의미들은 칼끝처럼 날카롭다. 그래서 호흡질환을 겪는 환자처럼 숨이 컥컥 막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예컨대, 버려지고 쓸모가 없어진 페트병과 용기들이 재활용되어 군대의 사열을 받듯 서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예쁘게 포장된 저 사물-존재들의 상처와 통증들이 고름을 쏟아내며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두려울 지경이다. 빈틈도 없이 착색된 조형물의 표면은 세상은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활력도 없이 차갑게 식어 있는 그것들은 도리어 결벽증을 환기시키며 아름다움을 반성하도록 촉구한다.
헌데, 변대용의 작업에서 일종의 반미학을 감지하는 것이 전혀 맥락 없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예술이 점차 심미적으로 변해가는 삶에 대한 저항을 내포한다면, 작가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자체로 제시하지 않고 반미학적으로 제시하는 과정이 부정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시 말해, 예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과잉된 열정이 넘쳐나는 지금-여기의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제시하면서 이를 위배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형식적 인공미에 대한 부정을 강하게 주장해온 현대예술이 조형언어의 확장을 통해 의식으로 통제되지 않는 자연적인 것 그리하여 무의식적인 것을 표출하려 했다는 점을 환기하면 변대용의 설치 작업에서 묻어나는,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에 함축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를 도출하는 게 전혀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두에도 진술했듯, 변대용의 설치작업은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그것이 아름다움 자체에 머물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그 작업에 숨겨진 ‘독’을 무심코 들이켰을 때, 그것이 일상적 심미화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아름답게 제작된 것처럼 보이는 조형물을 감응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독을 우리가 서슴없이 마시게 되는가? 아니, 어떻게 우리가 서슴없이 그런 독성을 알아차리게 되는가? 우선, 사실 전시라고 불리는 형식 자체가 이미 그러하겠지만, 숨 막힐 듯한 공간 배치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무균질 공간에 들어섰다는 인상을 주도록 배치되어 있어서다(작가의 이러한 공간 창출은 작가의 이전 전시인 <갈증이 나다>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기하학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있음에도 긴장을 보아야만 하는, 그래서 조형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전시공간의 긴장을 읽도록 배치한다.
즉, 완전히 형식적이고 인공적인 환경에 들어서도록 하면서도 이 인공적인 형식을 뒤틈으로써 생겨나는 부조화와 불균형을 감지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이물감이 고전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른 감각으로부터 이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의 결론부터 제시하면 변대용의 조형물은 아름답거나 예쁜 것과 관계되는,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최근의 일군의 젊은 작가들에게 유행처럼 번져 나가는 일종의 ‘캐릭터아트’와는 다른 궤도 위에 서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풍자와 위트를 전달하는 흐름과도 다소 거리가 있다. 변대용의 설치작업에 등장하는 익숙한 이미지로 포장된 조형들의 외관상 이미지는 실질적으로 부차적인 층위에 머물러 있을 뿐이지, 그 이미지 자체가 전시 전체의 지배적 의미로 구성되기 어렵게 한다. 요컨대, 변대용의 전시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귀엽고 예쁜 외양과 달리 제 형상을 지운다.
그런 점에서 변대용의 설치는 ‘아름다움’/‘非 아름다움’이 공존하고 있으며 전시공간에 대한 ‘긍정’/‘부인’이 갈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설치된 조형물의 존재론적인 지위를 스스로 위협하며 전시된 조형물의 몸체를 존재하게끔 하면서도 지워버린다. 이 때문에 변대용의 이번 설치작업이 ‘동상이몽’으로 설정된 것은 이런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 보자면 적절한 주제로 수렴되었음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작가가 의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술과 전시 자체에 대한 메타적 감각을 드러내 보인다.) 그가 이러한 전략을 통해서 엿보려고 하는 것은, 단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고 언제나 이중적인 방향으로 동시적으로 진행해 나아가는 종잡기 어려운 삶의 국면들에 대한 성찰이다. 달리 말해, 그가 제시해 놓은 설치를 따르다 보면 두 가지선택 가능한 지점에 서서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놓이게 된다.
‘샴 쌍동이’를 닮은 ‘샴 곰돌이’는 두 가지 선택 가능한 순간에서 고통스러운 분리를 경험한다. 상어(이전 전시에서 상어는 탐욕스러운 욕망을 형상화한 작가의 꼬리표이다. 물론 이 상어가 데미안 허스트를 지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곤경에 처한 예술가를 보는 것은 이상한 일일까?)가 그려진 곰돌이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현실적 욕망의 세계에서 자본주의적 형식을 승인한다면, 타인을 집어 삼키거나 물어뜯어도 고통스럽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 곰돌이의 웃음은 그런 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이와 달리 새가 그려진 곰돌이는 고개를 꺾고 낙담을 하고 있다. ‘새’가 만약 자유의 표상이라면, 현실적 욕망의 그물망에서 날아오를 수 있는 상징으로 등장했을 것이고 따라서 비루한 욕망의 궤적을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하는 순간 현실의 압력이 그 곰돌이에게 곧바로 엄습했을 터이다. 이상과 희망은 상어에게 오래 전부터 씹혀 먹히고 있었다는 것.
샴 곰돌이에게서는 선뜻 자유를 욕망하기보다, 자유를 욕망하는 것은 현실적 욕망을 폐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현실적 욕망에 안주하도록, 그래서 만족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인어가 들고 있는 것은 보다 직접적이다. 샴 곰돌이와 인어는 한 손에 상어 대신에 ‘칼’을 들고 있다. 자유를 욕망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시스템에 의해 회를 뜨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회로에 포섭되는 고통을 감내할 것이냐의 선택 앞에 놓인다. (또는 내 욕망을 위해 타인의 욕망을 제거해버리는 칼이거나. 혹은 그 칼로 ‘새’를 무참히 베어 버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무표정한 인어는 침묵하고 있지만, 칼을 선택하게 될 때 그녀의 신체가 횟감이 될 것임은 너무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누구나 ‘칼’을 선택하게 되리라. 특히 인어가 여성을 상징하게 될 때 여성 자신의 몸을 교환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 아, 성형과 몸에 과잉되어 있는 정처 없는, 심미화된 일상들.
미키-붓다(mickey-buddha)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댈 곳 없는 인간군상들이 경배하는 종교적 아이콘과 문화적 아이콘을 겹쳐 놓는다. 입에는 ‘동전’을 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숭고한 신념조차 화폐가치로 전도되어 버린 현실을 드러내면서 이 우상들에 대한 조롱과 파괴가 슬며시 짐작된다. 말하자면, 그 아이콘을 통해 현대인들이 구원받을 길은 없으며 자유를 성취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만, 화폐와 교환함으로써만 안식을 얻고 구원을 받을 뿐일 터이다. ‘미키-붓다’는 공포와 위협을 주듯 괴이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그를 통해 믿음의 증거인 돈을 받을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믿음은 미키-붓다처럼 ‘이미지’에 지나치게 경사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아니, 변대용은 이러한 현실을 피할 수 없으며 경배하면서 삶을 구원받는 척 할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대응하되 현실적 공포를 받아들이겠냐는 두 선택지를 제시하며 거기서 고통스럽게 멈추어 서서 삶을 성찰하도록 한다.
중요한 것은 변대용의 작업이 이 두 선택 사이에서 어느 것 하나를 분명하게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변대용은 ‘보색’을 통해 자유와 현실적 욕망을 이항대립적으로 설정하되 이 양자가 뒤섞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이란, 현실적 욕망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유로 대표되는 이상적 현실을 완전히 떨쳐내기도 힘든 행로의 연속이 아니던가. 하지만 명백하게 말해 변대용의 작업은 그것의 뒤섞임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선택이 자율적일 순 없고 시스템에 의해 강제된다고 하더라도 선택의 경로를 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율적인 선택(그것은 언제나 반사회적이고 반시스템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을 승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변대용은 침묵하면서 말하는 복화술사처럼 여겨진다. 마치 선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택의 자율성이 가능해지는 역설적 상황을 통해, 침묵함으로써 세계를 갱신시키려는 어법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어즈버, 그의 이 기이한 소통방식이 미술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행하게 하고 삶을 성찰하도록 한다면 피 냄새 나는 고통스러운 자유를 향한 행로는 긴장으로 몸서리를 치더라도, 숨이 목까지 턱턱 차오르더라도 얼마나 유쾌하며 그의 작업과 나누는 대화는 얼마나 즐거운 나눔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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